한국백혈병어린이재단(이하 재단): 소아암 어린이들을 위한 자원봉사를 하려고 하신 계기는 무엇인가요?
박동욱(이하 동욱): 한국에 돌아오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이 제가 예전에 치료받던 곳을 가보고 치료환경이 얼마나 변했는지 보고 싶었어요.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소아암 어린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갖고 싶었어요. 이제 졸업했는데, 직장생활을 하게 되면 아무래도 시간을 내기 어려울 것 같아서 한국에 온 이 기회를 잡은 거죠.
재단: 재단은 어떻게 아셨어요?
동욱: 예전에 제가 치료받을 때, ‘백혈병어린이후원회’라는 곳이 있었는데 그 기억을 더듬어 114에 물어봤더니 그런 이름은 없다고 하면서, 이 곳 전화번호를 알려 주더라구요.
재단: (웃음) 맞아요. 재단의 전신이 ‘백혈병어린이후원회’였어요. 2000년 12월에 한국백혈병어린이재단으로 바뀌었구요. 그럼 백혈병어린이후원회에 대한 어떤 기억이 있나요?
동욱: 치료받으면서 후원회 행사에 참여했던 기억이 있어요. 저는 김종서 콘서트에 간 거랑, 무슨 가족캠프 같은 곳에 갔었던 것 같아요.
박은솔(이하, 은솔): 저도 어렴풋이 기억나요. 통나무집 같은 데였는데, 오빠랑 엄마랑 같이 갔었어요.
재단: 예전 가족캠프 사진이 있는데 한번 찾아보시겠어요?
(인터뷰 도중 우리 모두는 급작스럽게 재단에서 보관하고 있는 옛 가족캠프 사진을 들추며 보물찾기 하듯 남매의 흔적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야! 호! 찾았습니다. 1995년 가을날 가족캠프 사진 속에서 꼬마 동욱과 은솔은 지금처럼 다정한 모습으로 나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진지하게 강의를 듣고 계신 젊은 어머니의 모습도, 늘 일로 바쁘셨던 아버지도 사진 속에 함께 계셨습니다.)
은솔: (아버지를 사진 속에서 발견하고는) 아버지도 오셨었네요. (웃음)
동욱: 아버지는 늘 바쁘셨는데 캠프까지 오셨는지는 몰랐어요. 이 통나무집 기억이 나요. 신기하네요.
재단: (어린 동욱은) 지금과 다른 모습이세요. (웃음)
동욱: 사진이 있을 줄은 몰랐어요. (웃음) 아마도 지금 재단에서 하는 이런 프로그램들이 치료받고 있는 친구들에게는 훗날 소중한 추억이 될 거에요.
재단: 동욱씨는 치료과정 중, 어떤 기억들이 남아 있나요?
동욱: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 몸이 너무 아파서 병원에 갔어요. 처음에 사람들은 꾀병인 줄 알더라구요. (웃음)병원에 가서 백혈병으로 진단을 받았죠. 어머니께서는 의사선생님과 말씀을 나누고 나오셔서는 ‘동욱아, 백혈병이래. 하지만 치료만 잘 받으면 나을 수 있는 확률이 70%가 넘는단다. 치료 받는 중에는 머리카락도 빠질 거래.’하시면서 진단명, 치료과정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셨어요. 그때 저는 병이 나을 수 있는 확률이 70%러눈 이야기를 듣고는 거의 100%에 가까우니까 ‘금방 낫겠구나!’라고 생각했어요. 어머니의 이러한 침착하고 자세한 설명이 치료받는데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지 몰라요.
재단: 병원에서는 어떻게 지내셨나요?
은솔: 오빠, 나도 그게 참 궁금했어. 병원에서 뭐하면서 지냈어? 난 병원에 한 두 번 오빠 보러 간 기억이 있기는 한데 뚜렷하지는 않아. 늘 오빠랑 엄마가 뭐하고 있을까 궁금했어.
동욱: 우선 병원에 있으면, 힘이 없어. 그래서 거의 누워있지. 누워 있으면서 아마 게임도 했겠지? (아이들이 게임을 많이 한다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좀 괜찮아지면, 병원교회에 가고 병동을 돌아다니기도 했던 것 같아. 또 그때는 병원 구석에 조리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어머니가 매일 먹고 싶은 것을 만들어다 주시고는 했어.
재단:
은솔: 저는 오빠가 아프면서 외갓집에서 지내게 되었어요. 갑작스럽게 오랫동안 엄마를 못 보게 되었는데. 초등학교 2학년 어린 나이에 엄마랑 떨어져 지내는 건 너무 두려운 일이었어요. 할머니와 외삼촌 가족이 정말 따뜻하게 대해주셨지만, 그래도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어요. 당시 악몽동 많이 꾸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항상 막내딸로 사랑받아왔는데. 오빠가 아프고 나서는 사람들의 관심이 오빠한테 쏠리는 것을 보고 좀 섭섭했어요. 모든 상황이 이해되고 당연한 거라 생각하기는 했지만, 때로는 그게 상처가 되기도 하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부모님들께 드리고 싶은 말씀은 형제들에게도 의식적으로라도 관심을 갖고 따라 시간을 내서 같이 지내는게 필요할 것 같아요.
동욱: 동생이 많이 힘들었을 거에요. 저는 아프기는 했지만, 늘 어머니께서 제 옆에 계셔서 돌봐주니까 심리적으로는 많이 힘들지 않았던 것 같아요. 제가 아프고 나서 아무래도 어른들이 저를 먼저 챙겨주고 신경 써주 |
시니까, 동생은 상대적으로 소외감을 많이 느꼈을 거에요. 이런 아픔을 겪어서 그런지 제 동생은 일찍 큰 것 같아요. 자립심이 굉장히 강하고, 자기가 할 일은 알아서 잘 헤쳐 나가요. 은솔이는 저도 잘 챙겨줘요. (웃음)
재단: 백혈병 진단을 받고 집안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동욱: 다른 집도 마찬가지일 거에요. 일단 아픈 사람이 생기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관심이 집중되죠. 이 과정에서 가족의 소중함을 알게 돼요. 전반적으로 가족의 생활양식이 건강위주로 바뀌고, 가족의 결속력이 강해지는 것 같아요. 그리고 우리 가족은 제가 아픈 이후로 신앙이 더 견고해졌어요.
재단: 치료받는 동안 학교생활은 어떻게 했나요?
동욱: 치료를 시작하면서 학교에 가지 못할 때가 많았어요. 너무 힘이 없으니까 공부하기도 힘들었지요. 그래도 틈틈이 어머니가 도와주셔서 공부도 하고, 과외도 했어요. 입원 중에는 담임선생님께서 병문안도 와주시고, 반친구들도 단체로 편지를 써서 보내주기도 했어요 학교로 돌아갔을 때는 친구들이 머리카락이 없다고 놀리거나 힘들게 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염려해 주고 스스럼없이 대해 주었지요. 아마도 선생님께서 친구들에게 미리 저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고, 친구들을 준비시켰던 것 같아요. 선생님과 친구들의 이러한 도움이 제게는 큰 힘이 되었어요. 저는 치료 중에도, 그리고 치료를 마친 후에도 학교생활을 해나가는 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먼 미래를 생각하면 학교 경험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 꼭 필요한 일이니까요.
재단: 유학생활을 어땠나요?
동욱: 처음에는 동생과 둘이서 미국에 갔어요. 부모님은 2년 후에 오셨구요. 부모님과 떨어지면서 남매 간에 더욱 의지하게 되고 우애가 깊어졌어요. 언어를 습득하는데 1년정도 걸렸던 것 같아요. 그리고 나서는 크게 어렵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재단: 치료경험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동욱: 이야기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치료받았던 일들에 대해 말하게 돼요. 제가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가 백혈병으로 치료받았다는 걸 알고 있어요. 물론 제 여자 친구도 알고 있죠. 저는 치료사실을 숨길 이유가 전혀 없다고 생각해요. 만약 이것을 숨긴다면 그건 자기 삶 전체를 부인하는 것 같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전 제 삶의 모든 과정이 소중하다고 생각해요.
재단: 동욱씨, 은솔씨의 말씀을 들으니, 가족들 모두가 암치료과정을 삶의 한 부분으로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대처해나가셨다는 생각이 드네요. 힘든 시기였지만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이 참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웃음) 그리고 동욱씨와 은솔씨는 너무 보고싶어하는 분들이 옆에 와계시는데 함께 가보시겠어요?
=>이날 인터뷰를 마치고 동욱씨와 은솔씨는 마친 희망美所 소아암센터를 방문한 어머님들과 즉석 만남을 가졌습니다. 어머님들께서는 치료종결 후의 생활 등 궁금한 것을 묻기도 하며 궁금증을 해소하였지만, 완치자를 보는 것만으로도 더 많이 행복해 하였습니다. 앞으로도 희망美所 소아암센터에서 더 많은 완치자를 만나보기를 기대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