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같이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고 학교를 그만 두고 많은 검사와 더 많은 약물들을 달고 살았습니다. 검사 결과를 받을 때마다 이게 정말일까 하는 마음이었고 잘못될지도 모른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을 부정하기도 했었습니다.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친구들과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만 홀로 떨어진 것 같고 뒤처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전 항상 평범한 삶을 꿈꿨습니다. 먹고 싶은 음식을 먹고 친구들과 놀고 숨이 차도록 뛸 수 있는 삶을 말이지요. 몸은 병원에 있지만 마음은 늘 병원 밖에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매번 하는 피검사도 싫었고 너무 아픈 골수검사는 더욱더 싫었습니다. 그냥 모든 게 싫었던 것 같습니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서 치료가 끝났습니다.
일상으로 돌아왔구나. 그 때는 그것만 생각했습니다. 그 뒤로도 종종 진단을 받은 때부터 치료가 끝날 때까지, 그리고 지금까지의 시간을 곱씹어 볼 때가 있었습니다. 그럴 때면 참 많은 생각을 하곤 합니다. 처음엔 죽음으로부터 멀어졌다는 안도감에 대해, 그리고 도움을 주신 분들에 대한 막연한 감사에 대해, 그 다음엔 일상에 대한 지루함을, 그 다음엔 ‘새로 얻은 생명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늘 답을 내놓지 못했습니다. 이제 막 새로운 삶을 살고 있던 저는 단지 현재의 편안함에 잔뜩 취해버렸던 것입니다. 목표 같은 것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대안학교를 운영하시는 목사님 한 분을 만나 그 밑에서 훈련을 받게 됐습니다. 수많은 설교와 상담 그리고 새로운 환경에서 저는 처음으로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당연히 쉬운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대안학교의 일정을 따라가기엔 제 체력이 너무도 부족했고, 몇 년을 놓고 살던 공부를 다시 하기 버거웠습니다. 저도 물러서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여기서 물러선다면 세상은 너에게 기회를 주지 않을 것이다. 네가 직장에 들어가서도 물러서는 삶을 산다면 그곳은 너를 쓰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넌 이미 다 나았다. 왜 병원에서 널 퇴원하게 했겠느냐. 너도 충분히 해낼 수 있다. 며칠만 참아봐라.’ 눈빛이 얼마나 단호하고 확신에 차 계시던지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네’ 라고 대답해 버렸습니다. 그렇게 하나씩 해나갔습니다. 책을 펴고 연필을 들고 앉아 있는 것, 걷기부터 달리기까지, 10개도 못하던 팔굽혀펴기를 15개, 20개, 30개로 늘려갔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한 가지, 감사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저를 위해 수도 없이 기도해주시고 도와주셨던 분들, 치료비를 후원해주신 분들, 아픈 형을 위해 골수를 기증해준 동생, 어려운 와중에도 열심히 일하신 아버지, 용기를 잃지 않을 수 있게 응원과 간호를 해주신 어머니,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허락하신 신께 감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불평할 수 없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목숨이 위태롭다고는 하나 죽을 만큼은 아니었고 아프고 힘들었지만 외롭지 않았습니다. 집이 여유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수많은 후원을 통해 치료받을 수 있었습니다. 병원을 나온 지 3년, 그 때가 돼서야 저는 저 이외의 것들을 볼 수 있게 됐습니다. 비로소 ‘정말 감사하다.’라는 마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엄청난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공부를 엄청 열심히 해서 일류 대학에 들어갔느냐, 아닙니다. 운동을 어마무시하게 해서 근육질 몸매를 가졌느냐, 아닙니다. 저는 그저 평범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조금 여유를 가지고 있고 주변에 일이 생기면 조금 더 나누고 친구들과 웃으면서, 또 가족들과 편안하게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단지 저는 오늘 하루를 살 뿐입니다. 감사할 일이 있으면 감사하고 슬픈 일이 있어도 감사하려고 다짐하고 슬픈 일이 끝나면 또 감사하는 하루 분량의 오늘을 사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하루는 늘 똑같이 흘러가는 것이었습니다. 병원에서의 삶도 제게 주어진 하루 분량의 오늘이었던 것입니다. 제가 그렇게도 힘들어 하고 그동안의 시간을 너무나 길게 느낀 것은 그 때의 고통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질병이 있으니까 아픈 게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하루하루 지냈다면 조금이나마 덜 힘들고 조금이라도 가벼운 마음으로 그 시절을 지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어차피 하루는 가는데 ‘왜 이렇게 불행할까, 난 왜 아무것도 되는 게 없는 걸까.’ 라고 생각한다면 고통을 더 키우는 일 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 어차피 지나가는 하루, 조금만 마음을 열고 받아들인다면 더 수월한 하루가 될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감당할 시험 외에는 받은 것이 없다.’ 미래에 대해서 아무도 확신할 수 없지만 여러분은 이 시간을 감당할 수 있는 분들입니다. 여러분은 누구보다 강한 힘을 가진 멋진 분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상황은 우리가 바꿀 수 없지만 우리의 마음은 우리가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조금만 더 받아들이고 참아보는 겁니다. 그렇게 잘 참아내고 벌써 오늘이 다 지나가면 ‘오늘 하루를 다 보냈구나, 정말 고생했다.’ 라고 스스로에게 혹은 아이에게 칭찬해 주세요. 그리고 지나간 하루에 감사하다는 마음을 가진다면 하루하루 더 많은 감사할 것들이 생기리라 믿습니다.
사실 다 써놓고 보니 이 글이 정말 위로나 힘이 될지 좀 걱정이 됩니다. 이제와 보니 그 때의 저는 너무 어려서 정말 그 과정들을 정신없이 지나쳤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마 여러분은 그 때의 저보다 훨씬 더 대견하고 멋지게 지금의 힘겨움을 이겨내리라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렇게라도 소아암 어린이 가족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어 감사한 마음입니다. 힘내세요!
정수영(1998년생)
2011년 4월 중증재생불량빈혈 진단
2015년 2월 치료 종결
현재 대전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재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