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꿈 많고, 사람을 사랑하는 22살 여대생입니다."
20년 동안 포항, 게다가 '오천읍'이라는 농촌마을에서 쭉 살아왔기에 제 대학생활의 꿈은 인맥을 쌓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입생 때는 다짜고짜 선배님들을 졸졸 따라 다니며 MT, 4.18구국대장정 등 다양한 대학문화를 즐겼습니다. 그리고 2학년 때는 경영학부 학생회 대외부장으로 활동하였으며, 올해는 학생홍보의 수석팀장을 맡아 홍보전략부와 미디어부 전체의 관계를 아우르는 위치에서 팀원들 간에 돈독한 우정을 쌓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그루터기'라는 민중가요 소모임, '크림슨'이라는 축구 소모임 등을 하며 바쁜 대학생활을 보내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제가 꿈꾸었던 대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제가 남들보다 바쁜 대학생활을 즐기는 게 가끔은 꿈인 양 믿기지 않습니다. 왜냐고요? 저는 2001년에 병실에서 항암주사를 맞으며, 병마와 싸우던 소녀였기 때문입니다. 진단을 받기 전까지 저는 부모님의 자랑이었습니다. 부모님 말씀도 잘 듣고, 공부도 1등인 착한 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저에게 백혈병이란 진단은 청천벽력과 같았습니다.
제가 그 당시 꼬마였다면 아무것도 몰랐겠지만, 한창 예민한 사춘기 시절이었던지라 충격은 더욱 컸습니다. 저에게 고난을 준 신들이 야속하였고, '죽음'이라는 공포 때문에 눈이 퉁퉁 붓도록 종일 울었습니다. 하지만 부모님께서는 항상 완치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셨습니다. 저를 위해 희생하는 부모님을 생각하며 그때부터 이를 악물고 나을 수 있다고만 믿었습니다. 단 한 번도 잘못되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완치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완치까지의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6개월간의 병원생활로 1년 동안 휴학을 했기 때문에 저는 중2로 후배들과 함께 학교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저를 힘들게 했습니다. 하지만 빨리 적응하기 위해서는 생각을 바꿔야 했습니다. '한 살 차이인데 그냥 친구해야겠다, 친구는 많을수록 좋지.' 같은 반 친구들은 예상보다 나를 잘 따랐고, 행복한 학창시절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친구들과 떡볶이 먹는 재미, 제주도로 간 수학여행, 야간자율학습 시간 등 남들에겐 평범한 학교생활이 저에겐 하나하나가 행복이었습니다. 진단 전에는 점수 1점에 아등바등 하였지만, 욕심내지 않고 제가 할 수 있는 만큼 틈틈이 공부해서 성적은 상위권을 유지하였습니다.
진단을 계기로 제 인생의 가치관은 많이 변했습니다. 누워서 가만히 제 심장 뛰는 소리를 들을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 되었습니다. 가족들과 맛있는 식사 한 끼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 쉬는 시간에 친구들과 수다를 떨 수 있다는 것, 봉사활동 후의 기쁨 등등. 남들에게는 평범한 일들이 저에게는 무척이나 소중한 일이 되었습니다. 저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것만큼 행복한 삶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늘은 저에게 다시 '건강'이라는 선물을 주셨습니다. 대학생활을 하는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저는 사람을 사랑하는 제 성향에 맞추어 서비스 분야에서 일하고 싶습니다."
특히, '승무원'이라는 직업에 매력을 느낍니다. 저는 그 나라의 이미지는 나라의 관문인 공항, 더 거슬러 올라가 그 나라 국적의 비행기 안에서 결정된다고 생각합니다. 제 자신으로 인해 한국의 이미지가 결정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저는 저를 위한 삶보다는 이타적인 삶을 살고 싶습니다."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 제가 조그만 희망이 되고 싶습니다. 저처럼 힘든 항암치료를 받는 환아들에게 완치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데 앞장서고 싶습니다. 언젠가 배우 김혜자 씨의 수필집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에서 빈곤국가의 참혹한 삶을 알게 되었는데, 마음이 너무 아파 펑펑 운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이후 가슴 속에 해외봉사활동의 꿈을 항상 간직해 오고 있습니다.
"저는 따뜻한 마음과 식지 않는 열정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몸소 실천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