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의 시작
처음
병원 3층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첫 항암제 투여 후, 불과 30여분 만에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다짐하고 또 다짐하며 암과 싸워 이겨보리라는 결심이 무색할 정도로 너무나도 고통스러웠습니다. 제대로 된 식사 한 번 못하고 뚝뚝 떨어지는 식염수방울에 의존한 채 5일 정도가 흘렀고, 머리카락이 하나 둘씩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불과 10여일 만에 제 몸은 심장만 콩닥거리는 단백질 덩어리가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봐도 항암제가 독하긴 독했나 봅니다. 암세포를 죽이면서 정상세포까지 같이 죽이는 항암제 앞에 면역력 제로가 된 저는 무균실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상한 복장에 마스크를 쓴, 세상과 단절된 곳 무균실…. 무균실에 있는 제 모습에 어머니께서 또 한 번 우셨습니다.
어린이날 선물
무균실에서의 생활은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그래도 몇 가지 생각나는 것이 있다면, 아침인지 저녁인지도 모르게 창문 하나 없었던 것과 침대 주위로 이상한 비닐 같은 것이 둘러져 있었고, 작은 텔레비전도 하나 있었다는 것입니다. 한 일주일 정도 약에 취해 병과 싸웠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나의 건강만을 생각하며 나와 함께 병과 싸워준 무균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제가 다시 일반병동으로 간 날이 5월 5일 어린이날이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면역 수치가 올라서 다시 건강을 되찾기 시작했다는 것에 어린이는 아니었지만 그 어떤 어린이들보다 값진 어린이날 선물을 받은 것처럼 기뻐했습니다.
조한길 선생님
그 후로도 항암치료는 몇 차례 더 계속되었고, 항암제 부작용도 더욱 심해졌지만, 무균실은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척수 검사를 할 때마다 이를 악 물고 버텼습니다. 항암제가 투여되는 날, 검은 줄을 타고 항암제가 몸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낄 때마다 저는 게임을 하던지, 영화를 보던지, 음악을 들으며 흥얼거리던지 하면서 항암이라는 단어를 잊으려 애썼습니다. 지금은 얼굴과 성함밖에 기억을 못하지만 제 주치의였던 조한길 선생님. 매일 아침 일찍 제 팔뚝에 큼지막한 주사 바늘을 찔러대셨지만, 잠깐 동안 나누는 연예인에 관한 농담과 대화는 아픈 제 마음을 이겨내는 데 아주 큰 힘이 되었습니다. “건강해져서 꼭 다시 찾아뵙겠습니다.”라고 호언장담까지 했었는데 기억하실런지 모르겠네요.^^
혼자가 아닙니다
처음엔 나 혼자 이겨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나 혼자만 아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생각이었다는 걸 알았습니다. 제 옆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저를 지켜주시는 어머니가 계셨고, 농사일로 바쁘신 중에도 제 목소리를 듣기 위해 날마다 전화하시는 아버지도 계셨습니다. 그리고 멀리서 연락을 해오는 반 친구들도 있었고요. 친구 같은 주치의 선생님과 간호사 선생님들, 그리고 저 뿐만 아니라 저희 가족들까지 챙겨주시던 한국백혈병어린이재단의 사회복지사 선생님들도 있었습니다. 이 모든 분들이 제가 아프고 힘들 때, 저만큼 아파하고 걱정해 주셨습니다. 이 분들이 제 옆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셨기에 저 또한 힘을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저는 결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피씩 ^^
공부요? 공부를 안해도, 공부를 못해도 다 대학 갑니다.^^ 가고 싶은 대학 못가도 찾아보면 얼마든지 다른 길이 있습니다. 저도 성적에 등떠밀려 현재 재학 중인 학교로 진학하게 되었지만, 1년이 지난 지금은 가슴 속에 작은 꿈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환경교사가 되겠다는 꿈입니다. 10년 뒤의 환경교사인 저를 상상하면 조금 아팠던 기억은 오히려 작은 추억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은 몸도 마음도 많이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눈을 감고 상상해 보세요. 이 아픈 날들이 지나고 나면 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난 무엇이 되어 누구와 어떤 대화를 하고 있을까? 상상이 안된다고요? 그럼 아주 어릴 적 가졌던 꿈을 다시 한 번 떠올려 보세요. 그리고 한 번 크게 웃어보세요. 비온 뒤 땅이 더 굳어진다고 하죠? 지금 오는 비는 그냥 맞아버리세요. 젖은 옷은 빨아서 말려버리면 되고요. 그다음 굳어진 땅 위에 인생의 탑을 쌓아도 결코 늦지 않습니다. 오히려 훨씬 튼튼하게 쌓을 수 있습니다. 기억하세요. 정말 지독하게 추운 겨울이 지나고 찾아오는 봄은 더 따뜻하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