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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이야기
  • [염다빈 인터뷰] 소아암 치료경험은 미래로의 디딤돌이자 둘도 없는 보물입니다
    한국백혈병어린이재단2014.03.18



  •    현실감 없이 내 병명을 알게 되었다.  


    2005년도에 갑자기 이사를 가게 되면서 생전 처음 보는 동네의 중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엄청난 소심쟁이인 나는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하지 못했고 사소한 것에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아마 이것이 원인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 1년 후인 2006년, 중 3이 되던 해 나의 몸에 이상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잇몸이 붓고 감기에 걸리더니 도통 낫지를 않았다. 감기는 원래 자연스럽게 낫는 거라며 병원에 가지 않았는데 더욱 더 심해졌다. 결국 아버지와 함께 등교 전에 잠시 들릴 생각으로 동네 병원에 갔다. 처음에는 단순한 감기라고 생각했지만, 의사 선생님의 권유로 피검사를 하고 더 큰 병원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다시 더 큰 병원으로. 솔직히 어리둥절했다. 학교에 가야하는데 병원만 전전하고 있으니 내가 어딘가 좀 아프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와중에 일하시던 어머니가 오셨던 것 같다. 사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두운 병실에서 혼자 방치되었던 것 같다. 아니 방치되었다기보다는 어른들은 바쁘게 움직였고 난 아무것도 모르고 기다렸다. 급성골수성백혈병이라는 내 병명을 듣게 된 건 조금 후의 일이었다. 신기하게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 그냥 현실감이 없었고 가기 싫은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기뻤다.


       힘들었던 기억보다는 내가 아프면서 변화된 일   


    치료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죽을 만큼 힘들었고 다시 그런 경험은 절대 하고 싶지 않다. 가슴에 관을 잡는 건 너무 무서웠고 거식증 증세가 있는데도 억지로 음식을 삼키는 건 너무나도 힘겨운 일이었다. 그리고 우울증이 왔을 때는 정신적인 고통이라는 건 이렇게나 힘든 것이구나 하고 체감했다. 그래서 나는 잠을 잤다. 최대한 많이, 깨어있어 고통을 느끼는 시간이 최대한 적어지도록. 그리고 괜히 깊은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책을 읽거나 자수를 놓거나 하는 활동은 조금씩 했지만 정말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지금 와선 내 무의식이 내 정신만이라도 지키려고 한 행동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 탓인지 나는 치료과정의 기억이 생생하지 않고 단편적이다. 때문에 나는 내가 아팠던 기억보단 내가 아팠음으로 인해 변화한 일들에 대해 전하고 싶다.
     

       가족의 따뜻한 온기에 치유받고 견뎌냈던 세월  


    앞에서도 말했듯이 나는 엄청난 소심쟁이였다. 중학생이 된 무렵부터는 어머니나 아버지에게 하고 싶은 말조차 못하고 거리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병에 걸리고 입원을 하게 되자 부모님은 나에게 너무나 친절하고 친근하게 대해주셨다. 아마 뒤에서 누구보다 가슴이 찢어지셨을 두 분이라 생각한다. 그래도 내 앞에서 언제나 웃으면서 내가 원하는 건 가능한 한 모두 해주려 하셨고, 나는 그런 따뜻한 온기에 치유받았던 것 같다. 이성이 아닌 마음으로 부모님은 정말 날 사랑하시는구나하고 생각하게 되었고 이것이 내가 힘든 치료를 견디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 같다. 실제로 입원해 있는 동안 부모님과 지금까지는 못했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아주 가까워졌다. 지금도 그 때 부모님이 내 곁에 계시지 않았다면 난 병마와 싸워 이기지 못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사이버학교에서   


    입원치료가 끝나고 나는 꿈사랑사이버학교에서 공부를 하게 됐다. 내신에 들어가는 시험은 학교에서 보되 공부는 집에서 컴퓨터로 하는 식이었는데, 나는 이 공부시간을 아주 좋아했다. 수업은 화상채팅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낯을 심하게 가리는 나도 쉽게 참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공부를 한다기보다 선생님과 다른 친구들과 함께 한다는 느낌이 강했기 때문에 너무나 즐거웠다. 후에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오전 수업만 듣고 귀가하는 형식으로 했던 학교생활에는 잘 적응하지 못했다. 하지만 사이버학교에서의 수업은 내가 태어나서 처음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선생님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또 따랐다. 모든 선생님이 좋았지만 난 그중에서도 국어선생님을 가장 따랐고 편지도 여러 번 주고받았다. 내가 현재 전공하고 있는 국어국문도 국어선생님과의 만남을 계기로 선택한 거나 마찬가지다.
      

      우선 이겨내. 그러면 아팠던 시간이 네 갈 길에 놓인 디딤돌이 될 것야.   


    나는 지금 본 치료는 모두 끝내고 부작용 치료만 받고 있다. 내가 겪고 있는 부작용은 뼈가 약해진 것과 우울증인데 둘다 꾸준히 치료를 받으며 약을 먹고 있다. 대학에서 원하던 전공을 하고 마음이 맞는 친구들을 새로 사귀면서 스스로가 많이 변화했다는 것을 느낀다. 소심쟁이였던 내가 아니라 뭐든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내가 된 것이다. 이 변화가 아주 극적인 것은 아니지만, 나의 삶은 아주 많이 바뀌었다. 그런 점에서 나는 내가 아파했던 나날들을 일종의 성장통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현재 한창 투병 중일 환아들에게는 어떤 말을 하면 좋을 지 사실 잘 모르겠다. 왜냐하면 투병의 아픔은 어떤 좋은 말을 듣는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는 걸 아니까. 하지만 이런 메시지는 전할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이겨내, 무조건 참고 힘내서 밖으로 나와, 그러면 네가 아팠던 시간들은 너의 미래에 장애가 되긴 커녕  네 갈 길에 놓인 디딤돌이 될 것이며, 다른 이는 아무리 갖고 싶어도 갖지 못할 보물이 될거야.’

    나는 아프기 전부터 개 한 마리를 키우고 있었다. 원래 개를 좋아하는데다가 당시 키우고 있던 개를 누구보다 사랑했다. 내가 병에 걸렸다는 걸 알았을 때 제일 처음 든 생각은 그 아이에 대한 걱정이었던 것 같다. 교수님께선 이제 개는 못 키운다고 하셨다. 나는 물었다. “그럼 얼마나 지나면 다시 키울 수 있어요?” 돌아온 대답은 5년. 키우던 개를 떠나보낸 후 나는 엄청 울었다. 치료를 종결한 후에도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 치료종결 후 5년째가 되던 해에 교수님께 다시 한 번 개를 키워도 되냐고 물었다. 하지만 안 된다고 하셨다. 그 뒤로도 외래에 올 때마다 물어봤던 것 같다. 왜 키우면 안 되냐고. 너무 키우고 싶다고. 그러기를 2년, 한 달 전에 교수님께서 드디어 허락을 해주셨다. 한 번 키워보라고. 너무 기뻤다. 옛날의 그 아이를 다시 안을 순 없지만, 새로운 아이를 안아볼 수 있다는 생각에 흥분이 멈추질 않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내가 아팠던 시간들이 내 삶에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앞으로 맞이할 새 식구와 함께 행복하게 살아갈 것이다. 

    - 완치자 이야기에 자신을 소개하고 싶은 분은 재단으로 연락주세요. (cancer@kclf.org, 02-766-76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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